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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빈, <기억을 담는 벤치>, 2009, 켄트지 위 플러스펜, 포토샵 꼴라주, 841 x 594mm



기억을 담는 벤치, 2009


· 철거된 건축 폐기물을 재활용하여 도시의 연속적 기억을 담는 벤치 디자인

· 서울 국제 벤치디자인 공모전 입선작

· 개인작업



Memorial Bench, 2009


· Proposed a public urban furniture recycling program to negate building waste

· Honorable Mention, Seoul International Bench Design Competition

· Individual work





콘크리트 벤치, 2008, 사진 ⓒ이규빈



서울의 풍경 한 조각, 기억을 담는 벤치


도시의 풍경은 옛 것과 새 것의 오랜 시간의 중첩이 만들어 낸다. 하지만 서울의 풍경엔 시간의 켜, 기억의 중첩이 보이지 않는다. 새로 지어진 으리으리한 건물들이 하늘을 찌를 듯 날카롭게 서 있는 서울의 도심에서, 잠시나마 마음 편하게 쉬어갈 수 있기는 한 걸까.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함께 공유하고,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도시 풍경이 되어 질 ‘벤치’에 도시의 기억을 담아낼 수는 없을까. 메마른 감성과 도시의 옛 풍경에 대한 갈증을 풀어줄, 그런 벤치는 없을까.



사진출처: Google Image

 


도시의 풍경, 기억의 매개체로써의 벤치


서울의 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하늘을 찌를듯한 고층건물부터 인도에 깔려있는 형형색색의 보도블럭에 이르기까지, 도시 풍경을 이루는 수많은 요소들은 계속해서 철거와 재생산을 반복해가고 있다. 이러한 순환 속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옛 것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워버리는 행태는 수 천년간 한반도의 중심으로써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도시인 서울의 정체성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말았다. 도시의 풍경은 오랜 시간의 켜를 가진 작은 요소들이 하나씩 포개어지면서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서울은 그렇지 못하다.


벤치는 고정된 도시의 풍경 요소이다. 건물이 철거되고 새로 세워지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키며 도시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벤치가 도시의 기억의 매개체가 된다면 어떨까. 새로운 건물이 들어설 때 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옛 건물의 일부가 벤치가 되어 기억을 품을 수는 없을까. 비록,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건물이 큰 의미가 없는 건물일지라도, 철거되기 직전까지는 분명 도시의 풍경을 이루는 요소였기에 그 기억은 충분히 의미를 가진다. 벤치라는 작은 매개체에 기억을 담아, 시간의 켜가 하나 둘 씩 쌓여가며 만들어내게 될 서울의 풍경은 지금의 반질반질 새것 같은 어딘가 불편한 모습보다 훨씬 더 정감 있지 않을까.



디자인 개념, 2009, ⓒ이규빈

 


지속가능함, 새것이 아닌 옛것에 대한 배려와 존중


최근 도시 디자인, 공공 디자인에서 ‘지속가능한 디자인’은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되어 자주 회자되곤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단어를 ‘새로 만들어지는 것’을 가지고만 생각하려 한다. 어쩌면 ‘지속가능한 디자인’의 진정한 의미는 새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이전에 우리가 도시의 풍경 속에 이미 가지고 있는 옛 것, 혹은 없어지게 될 것에 대한 고민이어야 하는게 맞지 않을까.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게 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옛 건물의 흔적은 모조리 ‘산업 폐기물’이 되고 만다. 새 건물이 아무리 친환경적인 재료를 쓴다 하더라도 그 건물이 들어서기 위해 수많은 유해물질, 폐자재, 분진이 발생하게 된다. 과연 이러한 방법이 진정한 ‘친환경’이고 ‘지속가능한 디자인’인걸까. 쓰레기가 되어 의미 없이 버려질뻔 한 옛 건물의 조각이 다시 벤치가 되어 대중에게 돌아왔을 때, 비록 전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한 조각이지만 거기에 담긴 의미는 그 이상일 것이다.

 


평면도 및 입면도, 2009, ⓒ이규빈



디자인


벤치는 디자이너 혹은 건축가에 의해 디자인 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시키고 서 있었던 옛 건물과 도시의 옛 흔적 그 자체가 벤치의 디자인이 된다. 벤치의 형태는 철거 과정에서 부서지는 자연스러운 형태에 의해 달라지게 된다. 의도하지 않은 형태는 오히려 벤치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벤치를 이용하는 방법의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 벤치의 재료와 색채 역시 기존 건물의 외벽 마감재에 따라서 결정되며 자연스럽게 도시의 새로운 풍경과 어우러진다.

벤치를 이용하는 사람은 지금 자신이 앉아있는 벤치가 옛 건물의 벽체의 일부분인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외형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흔적, 세월의 때가 새 건물의 반짝이는 유리창과 대비되는 모습을 통해 벤치가 담고 있는 도시의 기억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서울의 도심에는 고층건물들이 빼곡하다. 이러한 대형 건물에는 공공을 위한 공개공지가 마련되어 있긴 하지만 실제로 잘 사용되지 못한다. 설령 그곳에 벤치가 있더라도 쉬어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 너무 깨끗하고 새것 같이 보이는 ‘압도하는’ 디자인이 오히려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만 같다. 기껏해야 가로수 아래만 궁색하게 놓여져 풀과 나무들은 벤치를 중심으로 확장되어 도시의 poket park를 만들고, 그 위에 마치 하나의 조각품처럼 새로운 벤치가 놓이게 된다. 이런 벤치에서는 건물이 아닌 ‘시민’이 주인이 되어 마음 편하게 쉬어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비싼 돈을 들여가며 큰 건물 앞에 놓는 비슷비슷한 작가들의 조각품 보다, 답답한 도시의 풍경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기억을 담은 벤치 위에 앉아 쉬어 가는게 더욱 의미 있고 시적으로 느껴진다.



디자인 개념, 2009, ⓒ이규빈

 


구조


기존 건물의 벽 구조체의 일부는 그 자체로 구조물이 되어 땅위에 설 수 있다. 최소한의 디자인을 하여 최대한 기존 구조체의 형태를 존중한다. 단, 사람의 몸이 닿게 되는 윗면 부분에는 안전을 위해 곡면 성형된 목재판이 얹어진다. 기존 벽체 내부에 있는 mesh 철근을 이용하여 목재판을 고정하고 구조체와 판 사이의 얇은 틈새에는 LED 조명을 설치한다. 최근 들어 목재는 탄소 배출을 줄이는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새로 지어지는 것’에 잘 맞는 재료이다. 쓰레기가 될 뻔 했던 건물의 옛 조각과, 가장 친환경적인 재료인 목재의 만남. 벤치는 그렇게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어 만들어진다.



재료적 가능성, 2009, ⓒ이규빈



가능성


기존 건물의 마감재에 따라 벽돌, 콘크리트, 타일, 드라이비트, 여러 가지 색상과 질감의 벤치들의 가능성이 생긴다. 디자이너의 의도에 의해 정해지는 형태와 색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그동안 도시풍경의 일부였던 형태, 색, 질감이기에 그 어떤 디자인보다 도시에서 바로 그 자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벤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의 흔적이 묻어있는 이러한 재료적 성질은, 무언가 싹 밀어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주지 않고, 벤치 그 자체로 새 것과 옛 것의 기억의 공유점이 되어줄 수 있다.



형태적 가능성, 2009, ⓒ이규빈



또한, 벽체의 원래 형태에 따라 일자형 벤치 뿐 아니라, ‘ㄱ’자형 혹은 ‘ㄷ’자형의 벤치도 생겨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평면 형태의 벤치에서는 그만큼 더 많은 행위들이 일어나길 기대해볼 수 있다. 밤이 되면 벽체와 목재판의 틈새에 설치된 LED에서 빛이 흘러나온다. 희미한 빛은 벤치를 매개체로 하여 공유되는 도시의 기억을 은유하며, 하나의 오브제로써 벤치를 느껴지게 하여 도시 풍경에서 벤치가 가지는 의미를 상징한다. 이 틈새는 옛 재료와 새 재료가 만나는 접점이자 도시의 기억과 새로운 풍경이 만나는 기억의 접이기도 하다. 또한 야간 조명은 밤거리의 사람들에게 단조로운 도시 풍경을 재미있게 한다.


옛 건물이 없어지고 새 건물이 생기는 자리는 곧, 많은 사람들이 찾고 도시에서 그만큼 중요한 위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벤치를 산발적으로 도시 이곳저곳에 의도적으로 뿌려놓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도시 속에서 건물의 탄생과 죽음의 유기적 순환 가운데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자연스럽게 놓일 수 있게 만든다. 하나 둘씩 생겨나는 이러한 벤치들은 시간이 오래 흐르면서 계속해서 도시의 풍경을 만들어 나가게 된다. 더 나아가, 도심부 뿐 아니라,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는 곳이면 어디든지 이러한 벤치가 놓여 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재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서는 곳에선 잃어버리게 될 옛 도시의 풍경을 기억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 이러한 개념은 벤치가 아닌 가로등, 게시판 등 모든 공공 디자인에서 적용될 수도 있다.


공공디자인은 수많은 대중에 의해 쉽게 수용되고 소비되어질 수 있어야 한다. 벤치는 그런 면에서 대중에게 가장 가까운 공공디자인의 한 부분이다. 단순히 실내 가구를 디자인하듯 예쁘게 만든 벤치는 그 자체로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도시 풍경의 일부로는 오히려 흉물스러울 수도 있다. 겉모습만 예쁘게 다듬는 좁은 의미의 ‘디자인’이 아닌, 넓은 의미에서 도시의 경관의 일부로, 그리고 대중이 함께 향유할 수 있는 도시의 기억의 한 단면으로 놓여 질 벤치는 그 곳에서 쉬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잠깐이지만 달콤한 휴식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이규빈, 2009. 2